일기

제가 요새는 잠을 잘 잔답니다

을말 2023. 7. 17. 14:37
Otto Mueller (German, 1874 - 1930) Forest landscape (Waldlandschaft), 1924 Colour lithograph on paper, 24,7x17 cm

 
그리고 그게 도대체 어찌된 조화일까 생각을 해보았지요...
 
밥을 잘먹어서일까? 운동을 해서일까? 날씨가 더워져서? 공부가 잘돼서? 일이 잘풀려서? 부모님과 사이가 좋아져서? 장내미생물이 개선된 것일까? 예수의 힘인가? 인터넷 중독을 고쳐서? 도대체 왜?????!!!!!!!!!!!!!!!!!!!!!!!!!!!!!!!!!!!!
 
ㅋㅋㅋㅋ
 
구체적인 변화는 다음과 같음.
1) 방학이라 평소에 듣고싶었던 교양 강의(사설 아카데미에서 하는것. kmooc같은 대학강의 공유 프로그램도 있고, 이런거 요새 되게 많다. 특히 인문학 강의는 사실상 너무 많은듯...)를 하나 신청했다.
2) 강의가 되게 재밌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복습겸 다시 듣기도 함
3) 근데 다시 들을 때는 뭐 그렇게 집중해야 하는게 아니니까 걍 심심할 때 틀어두고 했음. 그러다 어느날은 샤워하고 나와서 잠깐 앉아서 듣다가 막 꾸벅꾸벅 좀. 그래서 침대 올라가서 푹 잠.
4) 어 이거 좀 뭐가 된다 싶어서 자기 전 강의 듣기를 반복함
5) 대성공
 
이었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유튜브용으로 올라오는 강의는 안된다
왜냐면 이런 강의는 애초에 유튜브로 볼 것을 예측하고 만드는 전문 영상이기 때문에 자극이 너무 큼. 폰트도 너무 잘보이고 현란하고 색깔도 많고 중간중간 포인트도 짚어주고 배경음악도 깔려있고... 이러면 잠 못들지
그러니까 진짜 강의실 뒤에서 그냥 기록용으로 찍은 영상같은 그런 걸 봐야함
근데 그렇다고 전혀 관심이 없는 주제의 강의여도 안됨... 당연한거지만 지루해서 딴짓을 하고싶어진다 그리고 기분이 흡사 벌받는 것처럼 되어서 자기전인데 정신상태가 좆같아지기도
 
 
좋은 변화여서 이 성공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
내가 그전까지 매우 소중하게 여겼던 무언가를 스스로 포기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씻고 침대에 누워서 이불에 몸을 폭 두른 채 안 봐도 되는 영상 보면서 즐거워하는 시간'...
 
거의 지난 10년 정도 동안 나한테는 이 시간이 너무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일찍 잠들어야 하는 날에도 30분만 유튜브 보다 자야지 하다가 (안봐도 비디오로) 새벽 4시에 쳐 자고 이러는 머저리짓을 하곤 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해서 뭐지???뭐지????? 하고 생각을 멈출 수 없었던 게. 강의를 보면서 스르르 잠드는 것은 저 시간을 포기하는 것인데 그게 됐다는 거잖아??? 정말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도 안 됐던 게 된다는 거잖아??? 도대체 어떻게 그런 거지...???? 싶어서!!!
 
여기에 대해 내가 세운 가설은 세가지 정도인데
첫째로 강의 듣는 건 어차피 핸드폰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 전에 누워서 유튜브 하는 거랑 겉보기의 포맷?이라고 해야하나 행동과 자세는 똑같다. 누워서 폰화면을 쳐다본다.
그래서 뭔가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대체제가 되지 않았나 하는것 하나
 
둘째는 그전까지는 유튜브 본다 -> 중간에 못 끊고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다가 결국 4시행 이 맨날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인스타나 이런 거 스크롤 무한으로 내리는 거나 유튜브나 넷플릭스에서 다음 회차 보시겠습니까 하고 뜨는 그런 거 다 사람이 거기에서 더 시간을 보내도록 설계된 거고(백화점에 시계랑 창문 없는 것처럼) 그걸 의지로 끊어낼 수는 없다. 외부 통제를 설정(알람 맞춰 놓거나 일정시간 지나면 폰이 잠겨버리도록 하는 앱 같은 거)하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냥 시작을 안 해야 함
근데 그걸 머리로는 알지만 인정을 못하니까 걍 오늘은 달라~ 30분만 보고 진짜로 끄고 잘거야~ -> 당연히 실패후 다음날 똑같이 반복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강의 보면 중간에 잠들기 때문에 원천차단이 가능. 그리고 강의영상 자체가 두시간임 '다음 거'를 볼수가 없음
 
그리고 세번째가 제일 중요하고 좀 더 심오한데
 
푹 잘 자고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활기차게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원하게 됐다는 것
 
이 변화가 사실 제일 큰 것 같다
누워서 핸드폰하는 거 졸라 재밌지... 너무나 재밌지.... 그걸 모르는 게 아님
하지만 내가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던 건 단지 그게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나한테 엄청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음 그리고 그 의미는 도피였다
 
자기전에 핸드폰<-이 습관으로 아예 굳어진 건 중학생때 정도인데, 물론 중학생때 제일 유혹도 크고 뇌도 아직 말랑말랑하고 유혹에 나약하고 할 시기인것도 맞지만 뭔가 나한텐 삶이 존나게 힘들었던 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는 고등학생 때처럼 기숙사에 들어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우리 집 정신병자께서는 내가 친구들이랑 밖에서 시간 보내는 걸 극혐해서 학교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진짜 아침에 눈떠서 밤에 눈 감을때까지 학교에 있는 시간 빼고 계속 지옥이었음
그래서 유일하게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시간 = 자기 전에 불끄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 이었고 이때만이 내가 자유롭고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거다
이때 핸드폰 보는 게 습관 되기도 했지만 저 시간에 그거 말고도 많은 일을 했음.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울기도 하고... 근데 핸드폰 보는 게 중독성이 다른 것보다 훨씬 크니까 아무래도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더군
그리고 진짜로 6초짜리 웃긴 영상 이런거 계속 보고있으면 뇌가 뱅뱅 도는 기분이 들기때문에 흡사 술취한 것처럼 되어서 현실을 잊어버리는 효과가 발생했었음. 비유가 아니고 말그대로 마약이었던 거지;; 그러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현실은 끔찍하니까
 
그런 일상 속에서 내 생각에는 내가 잠을 잘 잘 수가 없었던 게 아니라 잠을 잘 자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 같음...
잘 자면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나서 또 하루를 열심히 시작해야 되잖아 그런 걸 존나 견딜수가 없었던듯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것도 싫고 아침에 눈떠서 봐야되는 광경도 싫고 일어나자마자 마주치는 얼굴한테는 칼 꽂고 싶고 그런 심정인데 도대체 왜 잘 자고 싶었겠나 좆같이 안자고 아침에 좆같이 늦잠자고 학교도 안가고 씨발 될대로 돼라 그런 심정인거지...
열심히 살기도 싫고 잘 살기도 싫었음 그때는 심지어 행복해지는 것도 싫었음 너무 지쳐서
아 다 망해라 이미 망할대로 망했는데 더 망해봐라 어디까지 좆되나 한번 보자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 삶으로부터 잠깐이라도 도피할 수 있게 해주는 유튜브가 소중했음
거기 중독된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음 강제로 얽힌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고 있었지만) 는 기분이 아니고 진짜 너무 소중하고 고맙고 기쁘고 그런 기분이었음.
(중독이라는 걸 연구할 때 이런 심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술마시는 자기 자신은 한심하고 수치스럽지만 술은 사랑스럽다 이런 느낌이랄까 중독 대상한테 감정적으로 엄청난 애착이 생김)
 
근데 지금은 하는 공부도 재밌지
하는 일도 재밌지
정신병자는 안 만나지
돈 버니까 맛있는 거 요리해서 먹을 수 있고 보고 싶은 영화도 언제든지 보러 갈 수 있고 아주 살맛이 나는 것
그러니까 자연히 열심히 살고 싶고 활기를 원하게 되고 푹 잘 자고 아침에 잘 일어나고 싶어진다
포기가 되는거다. 밤에 핸드폰 보는 데 써야 했던 그 시간이
 
내 생각에 중독은 통제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분노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때 일어나는 일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망할 대로 망해봐라!! 더 망할 수 없을 때까지 망해봐라 씨발!! 이런 기분. 자기를 회복시키거나 정당한 반격을 하는 게 불가능할 때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데에 가세하면서 그렇게나마 잃어버린 통제력을 느끼는 거
반대로 자기 삶을 사랑하고 적당한 통제력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아마 쉽게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을거다. 뭘 보다가도 아 내일 아침에 힘들지 않으려면 이제 자야지~ 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이 있겠지
 
그러니까 !!! 이 글을 쓴 이유가 바로 이건데
삶이 뭔가 통 내맘대로 안 되고 내 뜻대로 되는게 아무것도 없고 자꾸 술이나 인터넷 같은 중독적인 것에 매달리게 되고 이게 점점 내 통제력을 넘어선다. 이런 공포와 짜증이 삶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지금 문제가 그 행동 하나를 교정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돌아봐야 한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데 그게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삶 자체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걸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아마 당신은 지금 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지 엄청나게 잘 알고 있을거다. 어쩌면 당장은 모르더라도 충분히 생각하다 보면 알게 될 거고 깨닫는 순간 "그거였단 말이야?????? 그거야 내가 그거 때문에 힘든 건 당연하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이런 생각이 들거다.
용기를 내고 마음을 굳게 먹고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수도 있다. 아마도 엄청나게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걸 깨닫는 단계까지 왔다면
 
화이팅
할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