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For you know better than I

을말 2023. 8. 24. 15:17


며칠 전 할머니가 죽는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이 상당히 심오하고 깬 뒤에 찬찬히 생각해 보면 무슨 의미였는지 생각할 것이 많아서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사흘째 매일매일 울며 잠들고 잠을 못 자고 있었다.

할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내 인생에서 내가 지금 하는 공부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를 처음으로 학교에 데려가준 사람 입학시킨 사람도 할머니였고 도서관에 데려가준 사람도 할머니였고 성당에 데려가준 사람도 할머니였으며
무엇보다...

내 할머니는 한국에서 할머니 하면 으레 생각할 만한 너그럽고 순박한 그런 이미지의 사람은 전혀 아니다
아주 까칠하고 뾰족하고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굉장히 엄했고 자라면서 맞기도 아주 많이 맞았으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주 화풀이를 하고는 했다. 그 화풀이도 깜찍한 수준이 아니었지 정말 어마어마했지... 대리석 장식품으로 배를 쳐맞아서 배 전체가 불그죽죽하게 물들 정도로 멍이 든 적도 있었고

그렇지만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을 해 본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동식물을 가리지 않고 뭔가를 키우는 것에 재능이 있었고 특히 꽃의 경우에는 전문 정원사보다도 솜씨가 좋았다.
원래 10년에 한번 꽃이 필까말까 한다는 나무들을 거의 매년 꽃을 피워서 나는 다른 사람들은 평생에 한번 구경하는 꽃들을 어린 시절에만 열댓번씩은 보고 자랐다. 그건 정말 마술적인 경험이었음. 과학으로도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집 정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니깐;;
물론 열심히 조사하면 설명 가능할 것이다. 그치만 어린시절에 그것을 보고 할머니에게 느꼈던 어떤 경외심! 마법사를 보는 것 같은 놀라움!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 할머니라는 특권의식, 그런 것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할머니가 무언가를 돌볼 때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돌보는가를 보았기 때문에
심지어 그 돌봄이 나를 향하지 않을 때에마저 할머니의 사랑과 함께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나한테 '생명'이라는 게 무엇인지를(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도처에 널려 있는지를) 가르쳐준 사람이었고 본인도 그런 추상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매우 편안하게 생각했으며
그런 사람이 내 유년에는 무척 드물었기 때문에(할머니의 입장에서도 평생 동안 드물었음) 우리는 희귀한 유대를 공유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가르쳐 준 그런 것들, 사람이 자기 몸과 자기 정신을 떠나서도 살아갈 수 있고 우리는 너무 작으며 생명은 광대하고 그 앞에서 언제나 겁이 들게 마련이라는 것... 그런 것들 덕분에 나는 살아남았다.
상처받거나 굴욕을 당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일은 있더라도 나는 할머니 덕분에 뚝 부러지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살아있는 것이 기뻤고 그 기쁨으로부터 어떤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아프게 하고 언제나 사람으로서 너무 부족해서 나를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 하고 나니 (아마 요새 있었던 여러 일들과 뭔가가 맞물려서 더 그런 것 같음) 팔이나 다리가 잘려나가는 그런 기분이 들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졌다
할머니가 없는데 어떻게 살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눈물이 콸콸 정말 말그대로 콸콸 쏟아졌다

그래서 막 불교관련 팟캐스트도 듣고 할머니를 급하게 만나러 가서 할머니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막 미친듯이 그것들을 메모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오늘 사실 지금 어딘가로 떠나고 있는데 보니까 공항에 기도실이 있더라고
기도실에 들어가니까 기독교 성서가 있길래 잠언(속담집 같은 거임) 부분을 슬슬 들춰보고 기도를 좀 했다.
근데 막상 자세를 잡으니까 뭔기도를 해얄지 모르겠는거임

할머니가 살아있게 해주세요? 그건 이상함 살아있는 사람은 다 죽을수밖에 없잖음 너무 욕심임
게다가 너무 specific함!! 지구상에 인간만 팔십억이 있는데 우리 할머니 한 명을 살아있게 해달라라... 그런걸 신한테 바라는게 맞는가? 그건 아닌 것 같았음
할머니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게 해주세요? 그것도 그냥 욕심인데다 그거는 기도해서 될일이 아니고 걍 내가 정말 그일이 일어나고 나서 필요하면 병원도 가고 상담도 가고 책도 읽고 하면서 열심히 대처하면 될 일임
그럼 할머니가 편안해지게 해주세요? 죽어서 살아있을때 겪었던 그 모든 고통과 실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세요? 거기까지 생각이 갔는데...

그러고 나니까 몬가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ㅋㅋㅋㅋ
접신을 했다!! 뭔가 음성을 들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게 아니고
ㅋㅋㅋㅋㅋㅋㅋ 뭔생각이 딱 들었냐면



'내가 알아서 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닠ㅋㅋㅋㅋㅋㅋㅋ 그렇잖아
신이 있는지 없는진 모르지만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일단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신이 있다고 가정을 하는거잖음?
근데 신이 있으면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마나 웃기겠어 "할머니를 나쁘게 대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이 부탁이...
그건 내가 알아서 잘 할거고 좀 고만 귀찮게 해라 싶을 거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었음 그래서 ㄹㅇ 울면서 기도하다가 피쉬식ㅋㅋㅋㅋ 하고 웃음

그러고 나니까 아~ㅇㅋㅇㅋ 이런 기분으로 슬픔이 좀 진정됐음
한편으로는 She's in good hands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뒤에 한 생각은 좀 자기만족을 위한 감이 있지만(할머니한테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할머니가 고통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니까) 그건 뭐 그정도는 스스로에게 허락해도 되잖아~ 싶음

그래... 우리는 세상의 힘에 대해서 정말 많은 것을 모른다 눈 하나 깜빡 한 번 하고 나면 사라져 있는 먼지의 먼지일 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좀 그만 울 수 있을 것 같음. 일정도 잘 다녀올 것 같고

기도를 할 줄 알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정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려고 언제나 애쓰고 있구나 싶었다. 인류에게 종교가 이렇게나 많고 곳곳에 종교의식을 위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언제나 별일 없이 괜찮을 것이다.
저는 오케이 오케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