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의 표정



영화를 보면 이런 표정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영화라는 게 그렇다. 무언가를 좇는 사람들이 나온다. "동기" 영어로 하면 모티프. 그래서 그걸 잡느냐 못 잡느냐,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이렇게 둘로 나눌 수가 있다. 대단히 많은 이야기가 그걸 잡아서 행복해졌다, 혹은 그걸 못 잡아서 불행히 죽었다, 라는 식으로 끝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이렇게 끝난다.
주인공이 마침내 그걸 잡았다. 마침내 무언가가 끝장이 났다.
그런데 도저히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그걸 바라보고 있는 거다.
'자, 이젠 무엇이 올까?'하는 식으로 차분할 수도 있고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이야'하는 식으로 절망할 수도 있지만 응시라는 동작만은 똑같다. 자기가 무엇을 보는지 알지 못하지만 눈을 떼지 못하고 보는 것.
현대 서양철학에서 '환멸'이라는 개념은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런 장면에서 배우의 표정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일종의 환멸이라고 생각한다.
환멸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은 라깡 혹은 니체이지 않을까 싶은데 (난 서양철학을 잘 모름) 대충 거칠게 무슨 뜻으로 쓰이냐면 이렇게 쓰인다.
인간은 항상 무언가 본질적인 것, 진실된 것, 영원한 것, 혹은 무한한 것, 이런 것을 추구하는데, 그런 추구의 과정에서 무엇을 붙잡더라도 결국에는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이 자기가 찾던 것은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멸, 환상이 사라지는, 순간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을 때 자주 저런 얼굴들이 생각난다. 주로 영화에서 본 얼굴들이 떠오르지만 삶에서 직접 본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종종 생각이 난다.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다거나 수다를 떨던 배우자가 잠에 들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혼자가 아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환상은 사라지고 삶만이 집에서 키우는 개처럼 나를 기다린다. 그러면 저렇게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내가 무엇을 보는지 모르면서 눈앞에 있는 것을 본다. 혼란스럽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지는 않다.
기록은 하나같이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글은 글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또 이것저것 중에서도 영화는 영화대로의 재미가 있는데 사람의 눈을 따라한 기계로 만들어진 기록이라는 점이 영화 특유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많이 보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자기 시야를 인식하게 된다. 내적으로 인식한다는 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프레임을 짜서 보게 된다는 뜻이고 외적으로 인식한다는 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를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델이나 방송인 같은 직업군이 아니고서야 많은 사람들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자기 모습이 어떤지 모른다. 그러니까 정말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거울이나 사진, 동영상으로 본 자기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도식화해서 한 번 그려 보는 것이다.
이런 머릿속에서의, 상상을 통한 시야의 변환, 일종의 점프가 이루어질 때, 영화 관객은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예술"을 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만 영화 예술이 아니고 영화를 보는 것도 영화 예술이다.
무엇이냐면 영화를 통해 자기self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단발적으로, 유한finitude을 탈피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예술은 곧 환멸의 굴레를 벗어나는, 혹은 그 궤도를 변경하는 수행修行이다. 종교의 언어로 말하자면 열반 내지는 깨달음, 혹은 구원에 가까이 가는 길이다. 그리고 간단하게 말하면 외로움을 가라앉히는 활동이다.
우리가 '쓰는' 것, 만들어서 외부에 남기는 것, 말로 하더라도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승하는 것, 곧 기록은, 인간 정신의 연장이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화면 속의 주인공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가 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카메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의 시야를. 모든 영화에서 카메라는 제 2의 주인공이다. 카메라의 어원은 "상자" 또는 "방"이다. 우리는 카메라가 담고 있는 것만을 볼 수 있다. 즉 카메라의 경계를, 곧 카메라를, 볼 수 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라는 건 결국 인간이 만드는 것이니까 감독이나 촬영자가 담은 것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영화 속 인물들을 볼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감독, 제작자 또한 보게 된다. 이런 이중 구조를 보는 경험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런 이중 구조를 재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무엇을 통해서? 위에 쓴 것처럼 상상을 통해서.
다시말해 영화를 봄으로써 영화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의 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앞뒤가 뒤바뀐 이야기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바깥에서, 어떻게 보면 '객관적으로', 다른 눈으로 보고 싶어하고 또 그렇게 보이는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역동이 '영화'라는 매체를 발명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출발은 인간 정신이 먼저라고 하더라도 영화라는 매체는 인간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때로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는,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일깨우고 상기시킨다.
옛날에는 저런 환멸의 순간들이 무척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다. 외부의 자극이 사라지고 혼자 남는 순간을 괴로워해서 이것 저것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중독은 사람이 외로움을 숨길 수 있도록 해준다.
그 때와 지금은 정말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은 고독을 누릴enjoy 수가 있다는 거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연장된 정신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조차 없는 진짜 고독. 그 때에는 명상을 할 줄 몰랐고 지금은 할 줄 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요인이 있었다. 영화와 내가 맺은 관계 또한 그 중 하나다.
환멸의 순간이 올 때, 나는 환멸의 표정을 떠올린다.
내가 환멸의 표정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내 얼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얼굴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있지 않은 한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 게다가 거울을 본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는 것이 내 "표정"인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보통은 얼굴의 한 점에 집중하거나 얼굴의 상태, 생김새, 이런 걸 보게 되니까.
이 다른 사람의 얼굴들 중 절대 다수는 내가 영화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들의 얼굴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 인간을 보고 싶을 뿐만 아니라, "담고 싶은", 그래서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인류 문화의 한 형태. 우리 정신의 하나의 특징, 하나의 욕심.
따라서 영화의 존재를 떠올리면 나는 환멸을 겪을 때 덜 외로워진다. 인생의 거대한 외로움 앞에서 필연적으로 혼란에 빠진 한 사람의 얼굴과, 그것을 포착하는 카메라. 그 뒤에 있는 또 다른 한 명의 사람. 이 이중 구조가 하나의 비유가 되어 나와 나 자신을 비추어 준다.
내가 나 스스로와 맺는 관계. 궁극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바깥 세계와의 관계 없이,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잠에 들기 위해 필요한 것. 자기 무의식 안으로 미끄러지기 위해 필요한 것.
우리에게는 언제나 바깥 세계가 필요하고, 또 우리의 필요나 욕구와는 관계 없이 바깥 세계는 언제나 "있다". 나와는 관계 없이 외부세계는 언제나 존재한다. (나는 유물론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점에 있어서는 관념론자와 영 타협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때로 그 바깥 세계로부터 물러나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상황이 고통스럽게 여겨지는 지경에 이른 사람의 경우, 적극적으로 고독과 친해질 필요가 있다.
영화가 존재하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그런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 영화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외로움 앞에서 조용히 표정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라.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카메라와 또한 카메라를 통해 그들을 보고 있는 당신 때문에.
당신을 비추고 있는 카메라가 없더라도 당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개입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무엇을 보는지 알지 못하면서,
당신은 스스로를 담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