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를 많이 보면 왜 정신병에 빠지는가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미디어는 어떤 특정 장르에 국한된 것이 아님. 인터넷 많이 하면 뇌가 썩는다 뭐 이런 과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님.
영화든 소설(문학, 비문학X)이든 드라마든 만화든 그냥 "픽션" 그 자체의 소비와 그것이 불러오는 효과에 대해 써보고 싶음.
일단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접 경험은 직접 경험을 구축한다"는 것임. 이 때 구축이란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라고 할 때의 구축임. 驅逐하다. 몰아서 내쫓다.
그래서 픽션을 많이 소비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정신의 불건강에, 단적으로 말하면 자살에 가깝게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함.
간접 경험이 직접 경험을 대체하기 때문에. 즉 환상이 삶을 대체하기 때문에. 삶이 삶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대체된다는 건 곧 죽는다는 것임.
어린 시절부터 십대 내내 나는 정말 고질적인 정신병에 시달렸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이 자살 충동이었음 (두 번째로 큰 건 불면증)
자살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했고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정말 많은 틀린 시도를 했음.
친구도 사귀어 보고 섹스도 해보고, 닥치는 대로 연애도 해보고, 병원도 가고 상담도 받고 책도 읽고 종교도 가지고 운동도 하고 식이 요법도 이것저것 해보고, 케타민 맞는 거랑 전기충격치료 빼고는 다 해 본 것 같음
근데 대학에 가니까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게 나아졌음.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인간관계가 싹 정리됐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지런해지고 활기차지고 도와주는 사람들이나 좋은 관계를 맺고 잘 지내는 사람들도 많이 생기고 생산성도 높아져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열심히 벌었음
그래서 도대체 뭐가 이 회복의 요인이었던 건가 하는 생각을 진짜 많이 함. 왜냐면 나한테는 자살 충동이 너무 큰 고통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게 생겨 있었음
이 주제를 가지고 사실 이전에도 글을 여러 번 썼는데 오늘 느낀 게 있어서. 지금 알 것 같은 게 있음. 바로 대학에 간 뒤에는 내가 픽션을 소비하는 데 들인 시간이 확연하게 줄었다는 것
초등학생~고등학생 때까지는 집에서 방치를 당했기 때문에 진짜 하루종일 TV, 비디오를 봤다. 특히 영화를 진짜 많이 봤고 그 다음으로 많이 본 건 소설책이고 중학생 되면서부터는 소설을 쓰기도 했음. 드라마도 종종 봤다
근데 픽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허구의 존재 목적은 본질적으로 엔터테인먼트라는 거임. 재미가 없으면 안 팔림. 아무리 가치있는 내용이어도 보는 게 지루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복잡하면 절대 안 팔린다. 저런 경우 아예 관중을 못 만나는 경우도 아주 많음. 출판사가 안 내 주고 영화사가 투자를 안 해주니까
바로 이 재미를 위해서 희생당하는 것들, 또 한편으로는 글 같은 미디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서 매체로는 전달되지 않는 것들, 이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 사이의 갭을 만듦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지루한 삶을 보내는 주인공"을 본다고 치면
주인공은 지루한 삶을 보내고 있지만 그걸 보는 우리는 결코 지루하지 않음. 우리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감독이 가능한 노력을 총동원하기 때문에. 구도도 예쁘게 잡고 사운드도 하나하나 디자인하고 배우도 잘생겼거나 특색이 있거나 하여튼 "보기 좋은" 사람으로 고르고.
차이밍량 같은 감독이 바로 영화의 이런 한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막 엄청나게 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롱 테이크 같은 거 찍고 그러는 거임. 관중도 불편하고 지루하고 재미 없는 경험을 하라고
하지만 이런 건 아주 특이한 예고
"재미있는" 쉬운, 편한, 고통스럽지 않은, 간접 경험을 많이 하면 사람이 어떻게 되냐면
"삶은 원래 쉬운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됨.
사람이 픽션을 보다 보면 몰입이랄지 공감이랄지 그런 게 일어나서 주인공이 곧 나인 줄 알게 되는데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뭔가를 보거나 읽는 동안 독자의 몸은 괴롭지 않고 편안함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비하자면 인간사의 어떤 가능성, 어떤 경험을 관람하는 것은 사실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편하고 고통이 적은 일임. 왜냐면 우리가 다른 존재의 삶을 관람하고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내가 내 삶을 살아갈 때에는 항상 죽음 혹은 그것의 증표, 이를테면 경제적 어려움이라든가 잘 풀리지 않는 인간 관계, 배고픔이나 몸의 병, 늙어감, 실패, 이런 것들을 마주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남이 그것과 싸우는 걸 "관람"할 때에는 나의 그건 잠깐 잊어버릴 수가 있음.
그런데 이런 경험을 무분별하게 계속 하다 보면 당연히 고통스러운 것보다는 고통스럽지 않은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되고. 술이나 담배에 중독되듯이 중독되는 것 같음.
이런 행동들이 계속 축적되어서 고통스러운, 언제나 죽음의 리스크가 있는 실제 삶보다 허구의 삶이 더 "아름다운" 것이라거나 더 "훌륭한", 심지어는 더 "진짜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그 다음 단계는 현실의 진짜 삶을 파괴하고 싶어지는 것임. 자살 시도처럼 액티브하게 갈 수도 있지만 그냥 천천히 자기 삶에서 자신의 의지력이나 개입을 줄여 나감으로써 자기self로부터 후퇴하는 사람도 많음. "오타쿠" 중에 이런 사람 꽤 많다고 생각함. 옛날에 저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사회적 지탄을 받은 이유도 어느 정도는 저런 게 아니었을지
그리고 한편으로 "삶은 원래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역설적이게도 어마어마한 양의 불안이 딸려 옴
왜냐면 내가 기준이 되어서, 내가 쉬운 일만 해야 하고 내가 좋은 일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인생인 것 같은데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힘든 일도 견뎌야 하니까. 그런 당연한 일상의 과제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게 됨. 그것들이 저런 상태에 이르른 사람들의 세계관을 배반하기 때문에.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살아야 하지?" 부터 "저런 걸 하면 내 세상이 파괴될 것 같아" 까지 얼마 안 걸림. 이런 사고가 아주 심각해질 경우에 일어나는 게 히키코모리 아닌가 싶음. 자기가 믿는 것을 보호하고 싶은 거임.
"죽음을 잊고 싶어하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사적 archenemy 가 아닌가 싶다
죽음을 잊고 싶어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사람들이 좇는 허구는 한두 개가 아님 셀 수 없이 많음
돈이나 권력을 하염없이 좇는 것과 자기 방 안에 틀어박혀서 봤던 거 또 보고 또 보고 하는 건 겉으로는 달라 보여도 결국 정신의 기전은 같다고 생각함
기성 종교는 여기에 대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해법을 내놓는 사고들인 것 같음. 예를 들면 불교의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자 평화이다"라는 생각이나, 기독교의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열등한(죽는) 존재이며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생각 같은 거.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죽음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열어 주는 것임
여하튼 그래서 마무리하자면 픽션 소비를 줄이는 것은 정신 건강에 매우 유의미한 시도라고 생각됨.
최근에 여러 이유가 있어서 또 뭔가 창작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자마자 17살 혹은 21살 때로 돌아간 것처럼 내면에 정신병이 창궐하길래 헐레벌떡 운동 했음. 그리고 이 글을 썼음.
끝